프로그레시브, 그 신비를 벗긴다
성시완님의 84년6월 '월간팝송'에 실린 글
글: 성시완
월간팝송, 1984년 6월호 게재
[유영재 타이핑]
** 머리말
언젠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물론 입시 때문이었지만) 남산 국립 도서관을 올랐을 때 산 허리에서 반기던 상쾌한 안개를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헤드폰에서는 Justin Hayward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내 피부에 와닿는 솜구름처럼 하얀 안개는 나를 비롯한 주위의 모든 사물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얼마전 월간팝송사로부터 프로그레시브에 대한 원고를 부탁받고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까, 그때의 안개가 바로 음악에 있어서 프로그레시브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그레시브는 blues, jazz, rock처럼 뚜렷한 쟝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모든 음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을 삼켜버린 상쾌한 안개와 같다고 비유해도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막상 프로그레시브라는 음악을 소개하려다 보니 약간의 두려움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프로그레시브라는 용어가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수많은 음악인과 음악 평론가들이 그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그레시브 정의의 어려움
확실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
첫째
프로그레시브라는 단어 자체가 음악 용어로 쓰이기에는 결코 모순되지는 않지만 어떠한 한 쟝르에 쓰이기에는 애매모호하며 매우 폭넓게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윤곽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프로그레시브는 록에만 국한되지 않고 재즈, 클래식 등 모든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프로그레시브는 crossover와 흡사하다.)
둘째
프로그레시브는 듣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자기 자신들을 '프로그레시브 주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주객이 일치되지 않을 수고 있다는 점에서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만으로도 어떠한 음악의 종류일지라도 프로그레시브의 테두리안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Progressive jazz, Progressive rock, Progressive pop 등등).
프로그레시브의 역사적 기원
다시 원초적으로 돌아가서 프로그레시브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게되면'진보적인', '전진하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단어가 음악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0년대 - Progressive Jazz의 탄생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재즈의 붐과 함께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재즈에 클래식처럼 화성법과 대위법을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Progressive Jazz 즉, 진보적인 재즈로서 프로그레시브라는 단어가 음악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여기서의 진보적이라는 뜻은 아마도 작곡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측되어 진다.
재즈, 클래식, 록의 관계
프로그레시브라는 음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암시했지만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록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클래식은 재즈가 발생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 때문에 클래식과 재즈가 먼저 만났으며 여기에 록이 뒤섞임으로서 프로그레시브라는 것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Progressive music과 제일 밀접한 것은 Jazz rock이라 생각된다.재즈에 록이 가미됐다는 것 자체가 프로그레시브의 의미를 지니지만 유럽의 재즈-록 아티스트들의 생각이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작
최초로 프로그레시브의 붐이 불기 시작한 것은 유럽, 특히 영국이었다. 60년대 말 영국에서는 비틀즈의 영향으로 팝 음악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때 몇몇 그룹들이 기존의 팝송 형식에서 벗어나 보다 복잡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초기 선구자들
- • King Crimson
- • Pink Floyd
- • Yes
- • Genesis
- • Emerson, Lake & Palmer
음악적 특징
- • 복잡한 리듬과 박자
- • 긴 연주곡
- • 클래식 요소 도입
- • 신시사이저 활용
- • 컨셉트 앨범
프로그레시브의 특성
🎵 음악적 진보성
기존의 3-4분짜리 팝송 형식을 벗어나 10분 이상의 긴 곡을 만들고, 복잡한 리듬과 화성을 사용하며, 클래식 음악의 작곡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 예술적 완성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예술로서의 록 음악을 추구했으며, 앨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하는 컨셉트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 실험적 정신
새로운 악기와 음향 효과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기존의 음악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프로그레시브의 재킷 예술
프로그레시브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재킷 디자인입니다. 단순한 디스크 보호가 아닌 음악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는 또 하나의 레코드 예술로 부각되었습니다.
🎨 재킷 디자인의 거장들
- • Hipgnosis - 재킷 디자인의 최고봉
- • Roger Dean - Yes 전담 디자이너
- • 음악과 더불어 강한 개성 표현
- • 예술적 완성도와 상징성 추구
🎭 마스코트 문화
- • Triumvirat - 생쥐(실험용 흰쥐)
- • Amon Duul - 들쥐(나그네쥐)
- • Henry Cow - 양말 한쪽(색상 변화)
- • Klaatu - 생쥐와 해, 우주
재킷이 재즈 문제였던 이유
재킷은 디스크 보호와 상업적인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프로그레시브 영역에서는 음악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는 또 하나의 레코드 예술로 부각되었습니다. Strawbs는 딸기를, Barclay James Harvest는 나비를 각각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룹명에 담긴 의미
프로그레시브 그룹들의 이름에서는 민족적이며 국가적인 정체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독일 그룹들
- • Wallenstein - 30년 전쟁 당시 독일장군 이름
- • Hölderlin - 독일의 시인 이름
- • Faust - '주먹'이란 순수한 독일어
- • Popol Vuh - 남미 마야족의 종교에 관한 책 이름
🇮🇹 이탈리아 그룹들
- • Agora - 고대 그리스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민중 광장
- • Banco Del Mutuo Soccorso - 공제를 위한 은행
- • Cervello - 두뇌
- • Latte E Miele - 젖과 꿀
🌍 기타 유럽 그룹들
• Twelfth Night (영국) - 셰익스피어의 동명 작품
• Granada (스페인) - 스페인 남부의 수도
• Machiavel (벨기에) - 이탈리아의 외교가이며 정치가
• E.A. Poe (이탈리아) -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이며 시인 에드가 알란 포
국가별 프로그레시브 분류
🇬🇧 영국 - 프로그레시브의 원산지
영국은 그야말로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재즈 록은 서서히 프로그레시브 영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발달 과정: 1960년대 말에 와서 절정을 이루게 되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서서히 침체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대개의 프로그레시브 그룹들이 영국 그룹들이며, 수많은 유럽국가들의 진보그룹들이 또한 영국의 진보그룹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 독일 - 신비주의와 전자음악
독일의 프로그레시브는 선조들의 민속음악과 클래식에 신비주의, 심층심리, 허무주의, 공상적인 요소를 가미시켰고, 여기에 1960년대 말의 미국과 영국의 록 그룹들의 영향, 마약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급성장했습니다.
Beat Group
영국과 미국의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으며 베를린을 중심으로 1969~1972년까지 전성기
Electronic Group
신시사이저를 중심으로 한 전자음악 그룹들의 발달
🇮🇹 이탈리아 - 감성적 선율
이탈리아는 독일과 함께 각각 백여개의 프로그레시브 그룹들을 갖고 있으며,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선율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기타 유럽 국가들
프랑스와 스페인 등도 각각 백여개에 달하는 진보그룹들을 갖고 있으며, 캐나다,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등 여러 국가들도 진보그룹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프로그레시브의 상업성과 시장 분석
중요한 사실: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결코 대중성이 전혀 없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1960년대 말 시장 성공
1960년대 말 레코드 산업계에 불황기가 닥치기 시작했을 때,영국의 대학가에서 프로그레시브 록 레코드가 큰 이익을 남겨주는 시장으로 등장함으로써 때아닌 지속적인 호황을 누렸습니다.
(참고자료: Special Report "Gramophone Records" Retail Business P.159, [May.1971])
🏢 주요 레코드 레이블
- • Polydor - 1970년대 초반 최대의 Progressive label
- • Virgin - 19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이미지의 프로그레시브 영역 장악
🌏 미래 전망
지금도 이 굴지의 회사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반도체만이 수출의 진로가 아니라 한국이 앞으로 낳을 프로그레시브 음악도 물질을 초월한 뜻깊은 예술의 수출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음악의 미래 비전
지금까지 다각적인 각도에서 프로그레시브라는 영역에 가까이 접근하려고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레시브라는 음악을 직접 듣고 느끼는 그 자체에 있다고 봅니다.
현실과 한계
불행한 것은 우리 레코드 시장에는 프로그레시브 계통의 음악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체의 것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남의 것도 잘 수입이 안되어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미개척 예술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희망적 전망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전체를 우리들의 음악 이야기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이며, 우리 음악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평론도 하게 되는 뜻깊은 장소도 수없이 세워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앞으로는 그러한 편식적인 냉대가 차차 풀리리라 기대하며, 현재의 우리에게는 접할 수 있는 소수의 프로그레시브 음악만이라도열심히 듣고, 느끼며,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결론
프로그레시브는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태도이자 철학입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정신, 상업적 성공보다는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자세가 바로 프로그레시브의 핵심입니다.
2년동안 대중매체 속에서 프로그레시브 지향의 음악들을 소개하면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이러한 음악에 있어 너무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일부 음악애호가들은 이러한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갖고 대단한 열의를 쏟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프로그레시브는 모든 음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을 삼켜버린 상쾌한 안개와 같다" - 성시완
원본 출처
1984년 월간 팝송 6월호
"프로그레시브 그 신비를 벗긴다"
P.S. 성시완씨가 지금부터 10년전에 쓰신 글이긴 하지만,
이 글을 보면서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프로그레시브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아니,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변화했다는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 역사적 의의
이 글은 1984년 월간팝송에 실린 프로그레시브 록 소개글로, 한국에서 프로그레시브 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의 귀중한 자료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